| ... | ... | |
|---|
| 33 | 33 | 한편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열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도 폴 스쿤 콘스탄티노폴 국회의장의 감독과 지회 하에서 민주적인 총선거와 콘스탄티노폴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건에는 의견들이 일치했지만 각국의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주장한 LSEC 국가들에 대하여 사비에트,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은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사비에트의 강력한 반대로 회의는 결렬됐다. |
|---|
| 34 | 34 | |
|---|
| 35 | 35 | 결국 5월 8일 오전 5시 루이나는 사전 선전포고 없이 사비에트와 소련이 직접 개입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콘스탄티노폴을 침공하였다. |
|---|
| 36 | | == 작전명 '긴급 분노' == |
|---|
|
| 36 | == 전개 == |
|---|
| 37 | == 전쟁 시작과 승리 == |
|---|
| 37 | 38 | 긴급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은 루이나가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
|---|
| 38 | 39 | |
|---|
| 39 | 40 | 조셉 맥클리프와 노먼 슈워츠코프를 지휘관으로 한 51,300명의 루이나 해병대, 제82공수사단, 육군 레인저와 델타 포스, 네이비 씰, 그린베레 등이 선두로 콘스탄티노폴에 공수, 상륙, 침투했고 이 뒤를 따라 보병연대와 공병대대가 상륙했다. 루이나 해군과 루이나 공군도 이를 지원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은 정규군 1300여명뿐이었다. |
|---|
| ... | ... | |
|---|
| 52 | 53 | |
|---|
| 53 | 54 | 5월 26일 아침 수비군은 루이나군 325보병 연대 2대대의 순찰대를 매복공격했고 루이나군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루이나군은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수비군의 주요 주둔지를 포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루이나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 콘스탄티노폴군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결국 오전 8시 30분에 항복하게 되었다. 수비군의 항복 이후 루이나군은 콘스탄티노폴군의 막대한 무기가 저장된 무기고를 접수할 수 있게 되었다. |
|---|
| 54 | 55 | |
|---|
| 55 | | 이렇게 겨우 18일만에 콘스탄티노폴 전역은 루이나의 손에 들어오는...줄 알았다. |
|---|
|
|
|
|
|
|
|
|
|
|
|
|
|
|
|
|
|
|
|
|
|
|
| 56 | 어쨌든 단 2주만에 콘스탄티노폴 정부가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폴 전쟁도 끝나는 줄 알았고, 콘스탄티노폴에도 평화와 자유로운 민주주의가 올 줄 알았다. 그러나… |
|---|
| 57 | === 붕괴 후 혼란기 === |
|---|
| 58 | 1969년 6월에 콘스탄티노폴 수상 관저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기동전 위주로 했기에 병력이 뒷수습하기엔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생활을 완전히 무시한 막장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온갖 곳에서 듣도 보도 못한 범죄자와 깡패, 무장세력이 콘스탄티노폴로 기어들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일개 유고랜드 갱스터였던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끌던 유일신과 성전이 있다. 저 멀리 중동에서 알카에다도 지하디스트 양성에 딱 좋은 환경에 군침을 흘리며 그들과 연계된 온갖 단체들을 콘스탄티노폴에 침투시켰다. 이들이 바로 ISIL의 전신이다. 이들은 반루이나 저항 뿐만 아니라, 각 세력을 충돌시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도록 했다. 그래서 루이나는 그들과도 싸워야만 했고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
| 59 | |
|---|
| 60 | 이 상황에서 원래 콘스탄티노폴에 살던 이들도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루이나군의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한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눴고, 중앙정부가 사라진 후, 루이나가 만든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 또한 막장 행정으로 민심을 얻지 못했다. |
|---|
| 61 | === 철군기 === |
|---|
| 62 | 군사잡지 플래툰의 종군기자인 태상호 기자가 2006년 플래툰 컨벤션에서 꺼낸 말에 따르면, 당시 루이나군도 철군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으나 자신들이 치안을 박살내 놓았고, 주변국의 '자유의 투사'들까지 루이나군을 잡으러 온 상황에서 손을 빼면 정말로 개막장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 철군을 하고 싶어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냥 있자니 주위 놈들은 죽여도 시원찮은 침략자 취급하고, 그렇다고 그냥 손털고 나가면 지옥이 펼쳐져서 국제적으로 욕 퍼먹을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
|---|
| 63 | |
|---|
| 64 | 자이툰에 한국군이 파병나가기 전 루이나군과 함께 이동하며 인터뷰하던 한국 기자가 "한국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라는 말을 하자 루이나군 병사가 기쁜 목소리로 "언제 오는가?" 하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국기자가 "한국군이 와도 그냥 평화유지군이고 전투병 파병은 어려워보이는데?"라는 답변을 하자 무척 실망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
|---|
| 65 | |
|---|
| 66 | 그렇게 전쟁에, 재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관계로 루이나군이 도입을 준비중이었던 UH-60 초기모델을 공동구매하는 것도 무산되었다. 결국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전선 확대가 결국 루이나군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
|---|
| 67 | |
|---|
| 68 | 콘스탄티노폴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루이나 행정부는 이듬해 7월부터 루이나군 병력이 콘스탄티노폴에서 일제히 철수해 교외로 병력을 돌렸고, 1970년 10월 12일, 마지막 전투부대가 떠났으며 참모단과 훈련단은 1971년까지 주둔 후 철수 했다. 9월 1일, 리처드 잭슨 대통령이 콘스탄티노폴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완전히 손을 뗐다. |
|---|
| 69 | |
|---|
| 70 | 그러나 사태는 이미 루이나군이 나간다고 해결될 수 없는 상태였다. 전부터 치안유지 능력이 심각하게 의심되던 콘스탄티노폴 신정부군과 경찰은 한술 더 뜬다.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 경찰에 지급한 권총이 며칠만에 암시장에 풀리고, 심지어 국내 방산업체가 수출한 AR-15 소총도 암시장에서 팔리며 IS가 AR-15에 광학장비를 달고 행진하는 모습도 확인되었다. 콘스탄티노폴의 군/경찰/민병대에 입대했다가 무기를 든 채로 탈영후, 콘스탄티노폴군이나 경찰의 제복을 입고 갱단세력에 합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일 정도였다. |
|---|
| 71 | |
|---|
| 72 | 결국 어느 정도 자치정부가 안정세를 보이는 듯하다가 계속되는 무장세력간 갈등과 정정불안,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지옥구덩이에 들어가고 말았다. |
|---|
| 73 | === 콘스탄티노폴 내전 === |
|---|
| 74 | 콘스탄티노폴 내전은 1970년 루이나군의 철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정부 상태의 장기 내전이다. 루이나의 침공과 점령, 이후 무리한 철군 과정에서 발생한 권력 공백과 치안 붕괴로 인해 수십 개의 무장세력, 갱단, 민병대, 자경단 등이 도시 곳곳에서 각축전을 벌이며 촉발되었다. 루이나군이 철수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는 급속히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경찰과 군부는 무기와 장비를 갖춘 채 갱단에 합류하거나 탈영하여 무장세력이 되었고, 루이나가 제공한 군수품과 무기 상당수가 암시장에 흘러들어갔다. 특히 루이나군이 버리고간 M67 무반동포등과 같은 고성능 화기가 풀려버리며, 일개 민병대가 중대급 화력을 보유하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바생하였다. 이 무기들이 시가전에 사용되며 도시 내 민간인 피해가 급증하였다. |
|---|
| 75 | |
|---|
| 76 | 오로지 민간인만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정기적인 전기 공급은 끊긴 지 오래고, 병원은 무장조직이 병사들을 위한 사병 클리닉으로 점령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갱단의 아지트에서 총기를 조립하는 법을 먼저 배웠고, 하루 세 끼가 아니라 하루 한 끼라도 먹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날로 여겨졌다. |
|---|
| 77 | |
|---|
| 78 | 도시는 명목상 자치정부가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구역별로 나뉜 무장세력의 군벌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들 세력은 마약 밀매, 무기 거래, 인신매매, 강도, 납치 등을 일삼았고,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경단과 민병대는 각자 자신들의 구역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강제징집, 보복 살인, 무차별 검문을 일상화하였다. 전통적인 국가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은 국제사회로부터도 ‘실패한 도시’로 평가받았으며, 유엔이나 주요 국가들도 평화유지군 파병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로 인해 도시 내부의 상황은 외부에서 거의 통제할 수 없었으며, 수십 년에 걸쳐 범죄와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장기적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은 세계적으로 최악의 치안 불안 지역 중 하나로 분류되며, 범죄, 분쟁, 무력 충돌이 일상화된 도시로 기록되고 있다. |
|---|
| 56 | 79 | == 침공 이후 == |
|---|
| 57 | 80 | |
|---|
| 58 | 81 | == 여담 == |
|---|
| 59 | 82 | |
|---|